기이할 정도로 적은 수의 사람이 탄 항해선 속. 날씨는 어쩐지 불길한 일을 예감하듯, 한리아에 가까워질수록 빗줄기가 굵어져갔다. 세계의 중앙에는 카루하잔 사막이 험난한 모래바람과 괴악한 지형으로 동서양을 쪼갰다. 당연히 그 험지를 비행선 하나로 넘어가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었다. 덕배는 포탈을 놓을 줄 아는 유니버스의 지인을 수소문해 룡궐까지 이동했다. 허나 그의 말마따나 한리아는 기이한 힘이 결계를 치고 있는 탓에 포탈을 놓을 수 없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덕배는 룡궐부터 한리아까지 배를 타고 온 것이다.

바람은 심하지 않았기에, 빗소리를 집중의 등불로 삼을 수 있었다는 것이 위안이었다. 책을 읽어가며 어떻게든 때운 지루한 시간이 지났다. 바다 위를 너즈막이 흔들리며 파도를 가르던 항해선이 한리아의 한 항구에 살포시 얹어졌다. 덕배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을 허리춤에 넣어둔 뒤, 여권을 꺼내들었다. 금방 총을 잡은 한 사내가 들어와 덕배에게서 여권과 기타 서류를 검사하였다.

수많은 나라들이 각자의 사정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약육강식의 논리와 끝없는 배신은 항간의 자연스러운 어둠이라 수많은 이들이 믿었으리라. 허나 한리아에서만큼은 그 논리가 통하지 않았다. 덕배가 이전에 한리아에 들렀을 때 배운 것으로, 한리아에는 ‘인, 의, 예, 지, 덕’과 조상이 신의 자리를 반쯤 대신하고 있다고 했다. 인간, 조상, 규율을 숭배하였다. 반대로 배신, 무례, 반칙을 죄악 중 제일이라 여겼기에, 항간 곳곳에 자발적으로 덕을 이루겠다 하는 자들이 서로를 추종하며 자경단과 비슷한 존재가 되었다. 그것이 어사라 이르는 이들로, 자신의 눈 앞에서 여행자들을 안내하는 이 자도 그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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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이라고 합니다. 허나 한리아에서 명(名)이란 비롯 겹치기 쉬운 것이니, ‘총사(銃師)’ 율로 불러주십시오. 앞으로 한리아에 계시는 동안 쭉 보조해드리겠습니다.”

덕배는 의문점이 들었다. 한리아에 들어오는 여행자가 여럿일 터인데 이 무사가 자신을 일대일로 전담한다니? 이전에 한리아에 여행을 왔을 때에는 없었던 일에 당황해 말을 잇지 못하자, 총사 율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마 광장으로 나오시면 바로 상황파악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허나 지금 대피령이 떨어진 터라, 극리님께서 부상자를 돌볼 수 있는 자는 호의를 베풀 수 있는지 정중히 여쭈어봐달라고 하셨습니다.“

비상상황, 부상자. 두 단어에 바로 덕배의 신경이 곤두섰다. 덕배의 불길한 감은 역시 틀리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비행정 위에서 한리아를 내려다 보았을 때에는 큰 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어갔다. 궁리를 계속하며 길을 걸어가던 중, 덕배는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항구의 광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무서울 정도로 고요한 주변을 보자마자, 끔찍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해답은 머지않아 알 수 있게 되었다.

남쪽 방향의 설산에서 기분 나쁜 하얀 빛이 퍼져나가는 것을 보았다. 하얀 색의 원호가 두어 번 하늘을 퍼져나간 뒤 온 마을을 재빠르게 쓸었다. 소리는 멎고, 색채는 사라지고, 빗줄기는 공중에서 멈춰버렸다. 바람은 불지 않았으나, 남쪽에서부터 자신을 밀치는 강력한 힘에 그는 중심을 잃고 넘어질 수밖에 없었다. 다급히 총사님을 부르며 위를 올려다 보았다. 총사는 넘어지지 않은 듯 했지만, 자신 또한 예측하지 못한 일이라는 듯 당황한 기색이 얼굴에 묻어나왔다.

이 기운은 분명히 빛의 기운이다. 허나 불길한 빛의 색과, 그 빛이 불러온 결과는 자신이 배운 것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였다. 자신의 과거 동료, 에드가 이후 던전에서 경험한 일을 회고하며 말한 적이 있었다. 빛이란 건 신에게 감읍을 해서 거래를 하는 것이 아니냐고. 간절한 기도가 신에게 닿으면, 신은 신도에게 대가를 가져가는 대신 소원을 이루어줄 힘을 주는 것 같다고.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신은 이 땅을 버렸을 것이다. 혹은, 이 땅에 있는 모두에게 끔찍한 벌을 내리고 속죄를 명령한다. 덕배는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이 땅은 신이 미워하는 땅이었다.

허나 이 강력한 힘 앞에 굴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심호흡을 하고 주변을 둘러본다. 강한 충격파는 이어지고 있고, 불길한 빛은 땅을 찢어가며 뿌리를 내리듯 했다. 이 정도의 힘이라면 부상자가 무조건 생기리라. 덕배는 그들을 지켜야만 했다. 빛이 벌을 내리던, 암흑이 득세하는 세상이던 무엇이 문제리. 그 모든 것에 상관없이 죄 없는 어린양을 구해야 한다.

“총사님! 치료에 응하겠습니다. 당장 길을 안내해 주세요!”

총사 율은 고개를 바로 끄덕이며, 한 방향을 가리키며 뛰기 시작했다. 이쪽입니다! 덕배는 고개를 끄덕이며 뛰기 시작했다. 총사는 손가락을 입에 넣어 휘파람을 불었고, 이내 옆 골목길에서 거대한 말이 율의 옆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는 덕배를 두 손으로 재빠르게 공주님 안기 자세로 채어 말의 등 뒤쪽에 올렸다. 덕배가 놀라 말을 잃었을 때, ‘손잡이를 제대로 잡으세요.’라는 말과 함께 높이 뛰어올라 말의 등 앞쪽에 안착하고 고삐를 잡았다. 한 번에 이랴, 하는 고함과 함께 고삐를 당기자 말이 남쪽을 향해 재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친구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

도화가 율이 세이리나의 손을 잡고, 마치 봄 나들이를 오듯 사뿐한 발걸음으로 먹 통로에서 빠져나왔다. 상황 자체도 한리아 무사끼리의 봄나들이었다면 정말 좋았을 것일 터이다. 허나 둘의 눈 앞에서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불길한 빛을 가슴에서 내뿜고 있는 거대한 뼈의 망령이었다. 그 다음으로 그 망령과 대치를 벌이고 있는 유호와 신궁이며, 또 그 뒤에는 수많은 민간인이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져있었다.

세이리나는 쓰러져있는 주민들을 보자마자 식겁해서 바로 뛰어들어가 치료 마법을 외기 시작했다. 도화가는 곧바로 상황 파악을 하기 시작했다. 한리아의 무사들끼리 구전되어온 태양의 전설. 태양의 빛은 죽은 자의 한을 엮어 괴물로 만든다. 태양의 빛을 본 자는 처음으로 기억과 정신이 망가지고, 이내 의식마저 태양의 것이 된다. 자신의 앞에 있는 이 망령은 태양빛이 공동묘지의 뼈를 꺼내고 엮어 만든 악령일 것이며, 쓰러진 민간인들은 태양빛을 본 나머지 착란을 일으키는 것이라.

“자, 눈을 감고 심호흡 하세요. 빛은 몰려가고 어둠이 안식을 찾아 줍니다.”

세이리나는 이전에 태양에 상처받은 이들을 치료하는 법을 배운 적이 있었다. 빛, 또는 어둠을 가득히 담아 불길한 빛을 몰아내고, 다시 임시로 가득히 채워 놓았던 마력의 균형을 되돌리는 일이다. 산산조각난 기억은 되돌릴 수 없지만, 정신과 호흡을 정상으로 돌리는 데에는 탁월했다. 써볼 일이 있으리라 생각한 적도 없고, 써본 적도 없기에 긴장이 역력했으나 차분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더 이상 다치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마음이 불안을 이기며, 그는 재빠르게 다친 이들을 보살폈다.